▲ 예지희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분노하는 사회’. 최근 몇 년간 언급되어 온 키워드이기도 한데, 연말 연초에 국내에서 벌어진 사건들 중 두 가지 사건이 그와 관련되어 떠오른다.

하나는 국내 한 항공사 기내 서비스 부족 시비로 인한 이른바 ‘땅콩 회항’사건,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인에 대한 의심으로 부부 간에 불화를 겪고 있던 한 중년 남성이 의붓 딸들을 인질로 잡고 시비를 하다가 결국 딸을 살해한 사건이 그것이다.

각 사건의 배경이나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아직 언급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두 사건의 가해자 모두 분노하고 있었다는 점 말이다.

분노라는 감정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분노는 인간의 뇌 중 ‘편도체’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서 복잡한 심리적 과정을 거쳐 표출되는데, 사람들마다 차이는 있으나 가장 바람직하게 자기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한편, 그런 조절 없이 분노를 그대로 안에서 삭이는 경우와 밖으로 이를 분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바로 이 뒤의 2가지 경우는 반드시 이를 적절하게 해소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분노’ 혹은 ‘화’라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욕구가 향하는 것에만 한정되는 것이므로 이 감정을 잘만 이용하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잘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게 된다면 문제가 커진다. 특히 사람들은 강자로부터 당한 억울함을 가슴속에 키워 두다가 이를 약자에게 ‘분노’로 표출하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그와 같이 표출되는 ‘분노’는 중독성도 있어서 분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면 우리 몸의 기능을 자율적으로 조절하는 자율신경계 중의 하나인 교감신경계가 사소한 자극에도 강한 흥분을 일으키도록 신경계 자체가 변화되기 때문에 결국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법정에 오는 여러 사건들 중 상당수가 그 ‘분노’에서 시작된 것들이 다수인 것을 보게 된다.

더구나 ‘중독성’ 있는 ‘분노 표출행위’는 종국에는 ‘약자’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이 가족이라는 일종의 사적인 구성원 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큰 사건으로 비화되기 쉽다.

결국 우리 모두 스스로 그 분노를 ‘적시’에 ‘제대로’ 표출하는 방법을 미리 습득하는 수밖에 없다. 분노 표출행위는 대물림도 된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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